조선후기의 신분구조

HOME locaion한국오씨의 기원 locaion오씨의 문화 locaion조선후기의 신분구조

조선 후기의 신분구조는 17세기 말까지 소수의 양반과 다수의 상민·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말기로 올수록 신분구조가 변화되어 다수의 양반과 소수의 상민·천민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대구부 호적조사에 의하면, 1760년에 9.2%의 양반호가 1858년에는 70.3%로 급격히 증가했고, 53.7%의 상민호가 28.2%로 감소하고 있다. 또한 37.1%의 노비가 1.5%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리고 김영모 조사에 의하면, 1684년에 4.6%의 양반호가 1870년에는 0.8%로 감소했고, 준양반호는 14.8%에서 41.7%로 증가했으며, 중인호는 3.0%에서 16.6%로 증가했고, 양인호는 17.4%에서 4.7%로 감소했으며, 천양은 7.4%에서 11.2%로 증가하였으며, 천인은 10.3%에서 10.8%로, 그리고 노비는 37.6%에서 2.2%로 격감하였다.

이것을 보면 168년 동안 급속한 양반의 증가와, 상민노비의 감소현상에서 특히 상민의 양반화와 노비의 상민화를 생각할 수 있다. 울산부 호적조사에서도 1729년에 유학(幼學, 10.4%)과 향반(14.5%)이 1804년에는 34.0%로 증가했고, 중간계급도 같은 기간에 11.8%에서 15.7%로 약간 증가했다. 그러나 상민은 같은 기간에 47.2%에서 48.0%로 거의 증가하지 않았으며, 노비는 26.5%에서 0.5%로 감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모의 조사에 의하면 1684년에서 1885년간의 신분변화가 양반은 3.0%에서 1.0%로 감소하고, 준양반은 2.2%에서 37.4%로, 중인은 0.4%에서 32.1%로 증가하고, 양인은 34.4%에서 12.2%로 감소되고, 천양은 1.3%에서 7.7%로 증가하고 있다.반면에 노비는 46.0%에서 0.1%로 감소하였다. 단성현(丹城縣)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여기에서 상민과 중간계급의 구성비가 거의 변화하지 않고 유학·향반과 노비의 경우는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신분의 상승이동을 의미한다.

호적상으로 밝혀진 이와 같은 사실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요즘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즉, 조선 후기 신분의 상승적 이동이 농촌과 도시에서도 일어나고 있지만, 과연 호적조사에서 나타난 신분변화와 마찬가지로 사회계층적 지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실제 호구 상으로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호적대장에 누락자가 많았기 때문에 표본의 타당성이 문제가 되고, 호적으로 직역과 신분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호적상에 그러한 변화가 존재한다면 실제는 그 이전에 신분 해체가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신분제도가 응시·입사·징세·군역에서도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 하였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용된 양반·상민·노비의 신분개념이 사회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개념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호적조사에 의해 신분구조를 파악한 결과, 양반의 증가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대부분인데, 과연 호적에서 나타난 유학=양반=지배계급의 등식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대구부의 호적에 나타난 유학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면서 전통 교육을 이수한 상민, 즉 피지배계급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중의 일부(부농)는 군관·향리·업무(業武) 등과 함께 중간층을 형성하는 것 같다. 필자의 분류개념에 의해 대구부의 신분구조를 재 측정했더니 지배계급인 양반호는 전체의 5% 내외이고 중간계급은 20% 정도이며, 나머지는 하층계급에 속하였다.

이러한 신분구조 변화의 요인을 일본인 학자는 인구의 자연 증가나 사회적 부패라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피지배계급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계급의식의 발전이 그들의 신분상승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뼈대를 이루는 신분제도와 구조의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실학자와 개화세력이 나올 수 있었고 농민혁명도 터질 수 있었으며, 근대지향의 진보적 교지(敎旨)와 갑오개혁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분제도가 허구가 된 실정에서 봉건체제의 유지는 불가능한 것이고, 이것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경우에 안팎의 도전을 받는 것이다. 그러한 도전 형태를 민란·화적·동학군 및 군국기무처의 개혁 요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갑오개혁 중에 나온 신분 개혁 내용은 봉건 신분체제를 기본적으로 부정하는 제도적 개혁이었다. 비록 그러한 신분 개혁이 즉시 실현되지는 못 하였지만, 반상제도와 문벌귀천 및 노비제도의 철폐, 그리고 과부재혼·면천 등은 근대 신분질서를 형성하는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신분이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존립하기 어려우면 자연히 이미 형성된 계급 개념이 새로운 인간관계, 즉 사회관계를 측정하는 척도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다. 여지껏의 신분 개념은 관직과 혈통 및 토지 소유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갑오개혁 이후에는 점차 직업, 특히 토지 소유관계가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실 19세기 우리나라의 신분 또는 계층구조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갑오개혁 이후에 사회변화와 신분변화가 대단히 심하였고, 동시에 계층 평가의 요인도 급변하였기 때문이다.또한 당시의 호적이나 양안(量案) 및 다른 자료에 의한 계층 측정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후의 자료나 단편적인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신분 [身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