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곡서원

HOME locaion금산오국화 선생 locaion우곡서원

우곡서원 (愚谷書院)

吳國華 公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순조18년(1818년)에 지방유림의 공으로 창건(創建)한 서원(書院)으로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地方敎育)을 담당(擔當)하여 오던 중 1864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으로 폐실(廢失)되었다.
이후(以後) 1892년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을 재루(齋樓)하였고 27년 후 1918년 우곡단(愚谷壇)이 세워져 봉향(奉享)하여 오다가 1950년 전쟁 후 복원(復原)되었다.

우곡단 전경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곡단 전경

1983년 3월 서원(書院)으로 격상(格上)되었으며 건물(建物)로는 돈륜문(敦倫門)을 지나 경내(境內)로 들어서면 正面에 네칸의 숭의당(崇義堂)과 동재(東齋) 순화재(醇化齋)와 서재(西齋) 영모재(永慕齋) 강당 좌측에 경절門과 세칸의 숭절사(崇節司) 신도비각(神道碑閣)과 公의 오언일구(五言一句) 칠언일수(七言一首) 유시비(遺詩碑)가 건립(建立)되어 있다. 現在는 每年 3月 上丁日 지방유림(地方儒林)의 참여(參與)로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참배객(參拜客) 및 후손(後孫)들에 의해 每月 初하루와 보름날 오전 배향(配享)을 하고 있다. 2007년 會長 吳相錘의 支援과 宗親 贊助金으로 改修하였다.

神道 碑閣 改修를 위해 지붕 解體作業 時 대들보 속에 1892년 上梁 當時 科程을 기록한 文書가 發見되었다.

後日 宗中歷史 記錄物 保存을 위해 複製 本 準備를 해두고 2007년도 宗親 獻 誠金에 의해 改修하게 된 그 科程을 별도 記錄하여 대들보 속에 함께 保管해 두었다. 敦倫門.上梁文은 第1代會長 오몽룡의 告成文 朗讀 후 記錄하였다. 敦倫門.神道 碑閣의 改修作業은 文化財專門 建築家 여인환 大木이 하였다. 宗親들의 參與로 이루어진 誠金內容은 烏石으로 記念碑를 制作하여 愚谷書院 境內에 설치해 두었다. 敦倫門 現版은 韓國戰爭 以後 愚谷書院 復元當時 25世 後孫吳相敦 親筆로 制作된 것이다.

신도비각

신도비각

2007년도 相銀 事務局長의 판단에 의해 後孫으로써 응당히 잘 보존하여야할 조상님의 혼과 숨결이 스며든 우곡서원, 금운정, 세천정을 地方文化財로 登錄 신청 시 추후 遺蹟地로 지정이 되면 각종 維持補修 비용을 官에서 支援받아 後世에 길이길이 保存될 수 있는 점을 착안하여 3개월간 老 宗親과 義城 文化院을 찾아 古文書 열람과 자료 수집을 통해 150여 페이지 분량의 報告書를 一目瞭然하게 작성하여 (우곡서원.숭의당.숭절사.순화재.영모재.경절문.금운정.금운정현판.세천정.신도비.유허비.국화공 묘소비석) 등을 義城郡廳과 慶尙北道 道廳에 地方文化財로 登錄申請을 하였다.

숭절사

숭절사, 입향조 오국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곡서원 표석/우곡서당 현판

蝸牛形터에 잡은 徵士 吳國華 公 墓所

公의 遺詩碑

五言一句

淸風懷靖節
黃花祭夷齊

맑은 바람은 전원생활을 즐기는 도연명을 생각하게 하고 가을의 황국화로 백이숙제의 높은 절개를 그리워하게 하는구나

七言一首

樹含紅色繡紋如 可惜丹心日送虛
世上深情樽有酒 性中近思道遺書
天連地氣溪聲潤 山抱雲頭影子餘
某說淸風無別洞 詩人到此樂幽居

나무는 붉은빛을 먹은 듯 하건마는 나의 일편단심은 날로 허송함이 애석하도다
세상에 깊은 정을 풀기에는 술독에 술이 있고 내마음 속에 지닌 상념은 도덕의 글이 끼쳐있네
하늘은 지기를 연하여서 시냇물 소리가 불어나고 산은 구름 머리에 들러 안겨 그림자만 남았도다
맑은 바람이 유별한 곳 없다고 이르지 말라 시절이 이러하니 숨어살기를 즐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