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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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之以德愛人 (군자는 덕으로 남을 사랑한다)

[의성읍 도동리] 한말 사재를 털어 문소 학교(聞韶 學校)를 건립한 門中有司 오진선(吳進善)의
공적비[의성읍 후죽리], 동산에 위치한 의성읍교회도 건립하였다.

유사오진선공덕비

유사오진선공덕비

고려현종09년(1018년)戶長이 統治
고려인종21년(1143년)義城縣 設置
고려신종02년(1199년)監務로 강등
大邱府에 竝合 - 義城縣 設置

高麗인종21 癸亥年(1143) 義城 縣설치 四方境界는 東 안덕. 西 군위 . 南 의흥 . 北 일직이었다. 당시호수는 6백37호 인구1955명이고, 군정은 시위군45명.진군68명.선군248명이었다. 俗姓은 장기에서온 吳氏. 진주강씨. 박씨이며, 京來姓氏는 王. 柳씨이며 촌성(본관)을 사용하는 정. 강. 김. 장. 노씨가 있었다. 마필을 공급하던 驛이 두곳 탑리靑路. 북원鐵破에 있었다. 縣廳은 南部 元興에 있었으며 1895년大邱府 義城郡이되었고, 1896년 慶尙北道 義城郡이 되었으며 1940년 義城面이 義城邑으로 승격되고 1942년 中央線 철도가 부설되었다.

임진왜란에서 김치중과 같이 왜구에 맞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의성 사람은 부지기수다. 국천(國薦) 효자인 신원록(申元祿)의 아들인 신심(申伈)과 신흘(申仡)을 비롯해 김희(金喜), 김응하(金應夏), 박광춘(朴光春), 오득심(吳得心), 오계방(吳啓邦), 정몽열(丁夢說), 정호(鄭瑚)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항전에도 격퇴할 수 없었던 왜구들의 마수는 살아남아 있는 여인들에게로 뻗쳐왔다. 연약한 여인들은 간악한 이리 앞의 사슴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아비에 부끄럽지 않은 지어미로서의 결단을 통하여, 그들이 사는 곳을 왜 의성(義城), 즉 의로운 땅이라 부르는지 결연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진왜란과 의성의 여인들 [壬辰倭亂-義城-女人-] (한국향토문화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증동국여지승람 내용고찰

世宗大王 實錄 제148권은 朝鮮 初期 地理로서 世祖가 集賢殿 直提學 梁誠之에게 命을 내려 만든 八道地理와 1454年 當代의 名臣 (卞季良.孟思誠.權軫.尹淮.申檣) 등이 國家의 統治를 위해 全國8道 官縣의 地理. 機構. 官屬. 奴婢 숫자를 포함한 내용과 1478年에 完成된 八道地理志를 포함하여 1481年 朝鮮8道 文士들의 詩文을 수록하여 完成된 朝鮮前期 地理地 集成編으로 東國輿地勝覽이 있다. 그것을 근거로 우리氏族의 관계된 一部內容을 確認할 수 있었으나 그 내용은 記錄치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靑年宗親들에게 氏族의 전개과정 敎育을 위해 1895年 編纂되었던 義城邑誌에 수록된 義城 縣 行政機構現況을 記述하므로 우리 氏族이 地域 內에서 活動하였던 當時 先祖들 位相의 範圍를 斟酌해 봄이다.

義城縣 (현령 종5품 문관): 호구수가 8,012호였다. 하므로 우리氏族이 地域 內에서 活動하였던 當時 先祖들 位相의 範圍를 斟酌해 봄이다.

鄕校 鄕廳(士族) (六房 衙前지휘:戶長) 무 청 군관 60명
훈도 좌수 이방(기찰) 이방 강무당 지인 40명
병방 호방 기고청 인리 114명
좌별감호방(기찰) 예방 군관청 사령 26명
예방 병방 친병청 관비 61명
우별감형방(기찰) 형방 선무청 관노비 67명
공방 공방

※ 용어설명
좌수: 지방士人 中 덕망이 높은 사람
인리: 관외청에서 근무하는 外衙前
지인: 행정, 군사 담당
사령: 심부름 하는 사람
훈도: 향교에서 교육 담당 從9品

의성읍내에는 해주오씨. 의성김씨. 경주이씨. 김해김씨가 주류로 동족마을을 형성하였다. 의성읍내 문흥리는 吏族 촌마을로서 현령은 중앙에서 사령장을 받은 문관이 지역에 당도하면 지방호족인 호장과 향청(지금의 지방의회)책임을 진 좌수의 도움을 받아 현령 지휘하에 육방 관속과 현(19개면포함)을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호장가계도는 직이 세습되었고 같은 신분 간 통혼이 되며 자손에게는 향교에서 지방교육의 기회와 더불어 과거응시자격이 부여되어 중앙관료 진출에 제약이 없었던 지방호족 신분으로 관아의 모든 살림을 총괄하고 (교육. 세금 .징집 .육방. 관속. 관노비. 기생)들을 관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비안, 다인현 縣監 從6品官이 지방을 다스렸다.

조선조 의성현 지도

조선조 의성현 지도

吏族村 慶尙道 義城

조선시대 의성 지역의 토성(土姓)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여지도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의성현의 토성으로 김(金) · 심(沈) 등 2성과 경래성(京來姓)인 왕(王)· 류(柳) 등 2성, 속성(續姓)인 정(丁)· 강(康)· 김(金)· 장(蔣)· 노(盧)· 노(魯) 등 5성, 마지막으로 촌성(村姓)인 장기 오씨(長鬐吳氏)· 진주 강씨(晉州姜氏)· 이족(吏族)이 된 박(朴)씨 등 3성이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토성으로 김(金)· 심(沈)· 홍(洪)의 3성, 촌성으로 정(丁)· 강(康)· 설(薛)· 노(盧)[노(魯)]· 김(金) 등 5성, 개경(開京) 출신의 왕(王)· 류(柳), 장기오(吳)· 진주강(姜)과 속성(續姓)으로 박씨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새로 늘어난 성으로 아주 신씨(鵝州 申氏)· 영양 이씨(永陽 李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한양 조씨(漢陽 趙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 안동 김씨(安東 金氏)· 풍천 임씨(豐川 任氏)· 영양 남씨(英陽 南氏)· 울진 임씨(蔚珍 林氏)· 고창 오씨(高敝 吳氏)· 진성 이씨(眞城 李氏)· 달성 서씨(達城 徐氏)· 월성 손씨(月城 孫氏)· 광산 김씨(光山 金氏)· 광주 이씨(廣州 李氏)· 평산 신씨(平山 申氏)· 월성 이씨(月城 李氏)· 반남 박씨(潘南 朴氏) 등 18성이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을 정리해 보면 의성현은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재경 관인(在京官人)과 재지 이족(在地吏族)이 각자 자신의 위치를 지키면서 공존하였으나 점차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각종 사화와 임진왜란 등을 겪으면서 의성 지역의 향촌 지배 세력은 외부에서 이주해 온 성씨 집단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의성현의 대표적인 재지 士族으로는 토성으로 성장한 의성 김씨를 비롯하여 타읍에서 이주한 안동 권씨(安東 權氏), 아주 신씨(鵝州 申氏), 안동 김씨(安東 金氏), 영천 이씨(永川 李氏), 영양 남씨(英陽 南氏) 등이 있다.

의성 이족(義城吏族)으로는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었던 의성 김씨를 비롯하여 촌성인 정씨와 속성인 의성 호장(義城戶長)을 세습한 이족인 南村 吳氏 등이 있다.

朝鮮祖 中期 - 末期 義城縣 縣令 및 忠禮派 戶長現況

(忠禮 公 (1506 -1572年) 義城縣 戶長)
(1593년) 義城縣令 李汝溫 (여러고을에서재물을탐하여사간원파직탄핵)
(1631년) 義城縣令 鄭世奎 守心 公 (1534 -1594年) 義城縣 戶長
(1641년) 義城縣令 許厚 孝淳 公 (1577 -1641年) 義城縣 戶長
(1655년) 義城縣令 安應昌
(1668년) 義城縣令 李堂揆 尙倫 公 (1604 -1661年) 義城縣 戶長
(1691년) 義城縣令 黃膺一 震豪 公 (1640 -1707年) 義城縣 戶長
숙종21을해   (1695년) 義城縣令 全克泰 伯封 公 (1660 -1695年) 義城縣 戶長
28임오   (1702년) 義城縣令 金鎭華 震豪 公 (1640 -1707年) 義城縣 戶長
(1725년) 義城縣令 李友信
(1746년) 義城縣令 李吉輔 信雄 公 (1685 -1749年) 義城縣 戶長
(1757년) 義城縣令 金鍾正
(1770년) 義城縣令 徐命敏
(1791년) 義城縣令 黃基玉 慶岳 公 (1709 -1780年) 義城縣 戶長
(1804년) 義城縣令 金履復
(1810년) 義城縣令 趙命夏
(1816년) 義城縣令 柳尋春 大成 公 (1736 -1819年) 義城縣 戶長
(1865년) 義城縣令 趙明河 營甲 公 (1759 -1829年) 義城縣 戶長
尙年 公 (1785 -1862年) 義城縣 戶長
고종04   (1865년) 義城縣令 朴最壽 慶尙左道暗行御史 朴瑄壽(박선수) 出道
고종19   (1882년) 義城縣令 李揮應 度甲 公 (1832 -1882年) 義城縣 戶長
광무원년   (1897년) 義城郡守 徐相鶴 度甲 公 (1833 -1902年) 義城郡 戶長

- 義城 海州吳氏 忠禮 派 門中 -

(一名: 南村吳氏)

조선조 경상도 의성현 19개(面)중 의성현 관아가 위치한 남부면(현 의성읍 도동.도서.후죽.중리일부)은 의성 해주오씨(충예파) 일명: 남촌오씨들이 모여 살았던 집성촌으로1832년 조사당시 전체가구1.117호중 南村吳氏가 700가구가 넘었으며 氏族 戶長에 의해 의성현 해주오씨 전체씨족을 구역별 8개門長 제도를 두고 자체에서 통제해 온 문헌기록(朝鮮朝鄕吏의硏究 . 朝鮮總督府발행 朝鮮의聚落)과 문중에 전래된 古書本과 遺物이 있다.

설단소에서 본 의성읍내 전경

설단소에서 본 의성읍내 전경

- 의성 해주오씨 문중 입향조 고려징사 오국화 선생 -

(추상년대 1340-1420년)

입향조 오국화 선생의 생애
입향조 오국화 선생의 선조는 중국 오씨(泗川省)에서 東來한 것으로 추상이 되며.. 선생께서는 고려 왕조가 망하고 타향객지 문소 어봉산에서 홀로 은둔하시다 생을 마감하시므로 譜系(보계)는 모두 失傳(실전)되고 후손들은 흩어져 거주하여.. 전래된 유품은 없으나 1918년 門中 都有司 吳世鼎 편찬. 1935년 후손 吳鶴洙가 간편한 금산실기 중간발(錦山實記重刊跋)에는「“선생께서 평생토록 지은 책 시렁에 넘치고 용마루를 채우며 책이 담긴 수레를 끄는 소가 땀이 날 정도로 많았으나 여러 차례의 병선(兵燹)을 겪으면서 오늘날에는 수지잔묵(數紙殘墨)만이 전해진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망국의 한을 달래는 선생의 五言一句 . 七言一首 遺詩만이 전해진다.

보계 (譜系)
입향조 7世 오국화(吳國華) - 8世 오진(吳進) - 9世 오변(吳變) - 10세 오영창 (吳永昌) - 11세 오충예 (吳忠禮) 義城縣 戶長 (1506 – 1572년)

지역유림들이 함께한 문중 향사준비

지역유림들이 함께한 문중 향사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