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오씨득관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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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의 문화
해주오씨득관시조
해주오씨 시조(始祖) 인유공(仁裕公)에 관한 최초(最初)의 기록(記錄)은 1401년(조선태종1년) 舍人公(先敬)이 만든 해주 오씨(海州 吳氏) 족보(族譜)에 처음 나타나는데 여기에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오인유(吳仁裕) 본(本) 해주(海州)라 쓰여 있으며 정확(正確)한 연대(年代)나 배위도 묘소(墓所)도 알 수 없다, 그 후(後) 1600년 오희문공(吳希文公)의 족보(族譜)기록(記錄)에서 시조(始祖) 軍器監 監 吳仁裕라 하였고 1634년 甲戌譜(갑술보)를 위시하여 戊戌譜(무술보1787년) 辛卯譜(신묘보1771년) 戊辰譜(무진보1928년) 甲辰譜(갑진보1964년) 辛未譜(신미보1991년)의 修譜와 함께 海州吳氏 始祖로써의 위상을 超然(초연)히 자리하면서도 정확(正確)한 年代를 조명치 못하였으나 재야 보학자(譜學者)들의 견해(見解)를 따르면 950년 설과 1120년 설의 양설로 제시되고 있다.
해주오씨 경파 시조 (高麗軍器監 吳仁裕)
1401년 오광정, 오선경이 작성한 《해주오씨족도》에 의하면, 시조는 오인유(吳仁裕)이다.
오인유를 시조로 삼는 종파를 해주 오씨(海州 吳氏) 경파(京派)라고 한다. 《해주오씨대동보》에 수록된 〈문양공 지석문(文讓公 誌石文)〉에 의하면, 오인유(吳仁裕)는 중국 송나라의 학사로 984년(성종 3년) 고려에 귀화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고, 해주(海州)에 정착하면서 해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경기도 용인시에 해주 오씨 시조단이 있다.
해주 오씨(海州 吳氏)는 오씨(吳氏) 문중에서 가장 번성한 가문이 되었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윤겸(吳允謙)은 관찰사와 좌부승지를 지내고 인조반정 후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낸 뒤 우의정과 영의정에 이르렀다. 오윤겸의 손자 오도일(吳道一)은 숙종 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오윤겸의 현손 오명항(吳命恒)은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우의정에 이르렀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정방(吳定邦)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고, 오정방의 증손자 오두인(吳斗寅)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吳太周)는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으며, 오태주의 아들 오원(吳瑗)과 손자 오재순(吳載純)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해주오씨 향파 시조(海州吳氏鄕派始祖) 고려군기소감 오종인(高麗軍器所監 吳宗寅)
오응(吳膺)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 오응(吳膺)의 9대손 오희(吳禧)는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고 오희(吳禧)는 국구(國舅)가 되어 다련군에 봉해졌다. 장화왕후는 고려 2대 왕 혜종의 모후가 된다. 오응의 12대손 오광우(吳光佑)가 980년 다시 송나라에 들어갔었는데, 그의 玄孫인 오연총(吳延寵)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으므로 오연총이 오씨의 중시조가 된다. 中國 泗川省 출신의 오연총은 고려에 동래하여 윤관과 함께 부원수로 북변의 여진을 토벌하였으며, 이부·예부·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吳守權)은 오현보(吳賢輔) - 손 오종인,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이라는 세 아들(삼군 분파설)을 두었다.